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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조
鼻祖
겨레나 가계의 맨 처음이 되는 조상 또는 어떤 사물의 시초, 학문이나 기술을 처음 시작한 사람을 비유하기도 합니다. 비슷한 성어로 남상(濫觴), 원조(元祖)가 있습니다.
비조는 한나라(漢)의 사상가 양웅(揚雄, B.C. 53~18)이 『이소(離騷)』를 짓고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진 굴원의 행동에 의문을 품고, 그가 지은 『이소』의 구절을 따서 반박한 글인 『반이소(反離騷)』에서 자신의 가계(家系)를 설명한 데서 유래하였습니다. 양웅은 촉(蜀) 땅 성도(成都) 출신입니다. 양웅의 조상 중에 주백교(周伯僑)가 있었는데, 그의 서자(庶子)가 진나라(晉)의 양(揚) 땅을 식읍으로 받았고, 이를 계기로 양을 씨(氏)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백교가 주나라(周)의 어느 계열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양 지역은 황하(黃河)와 분수(汾水) 사이에 있는데, 주나라가 쇠퇴하자 양씨의 누군가가 후(侯)를 칭하며 양후(揚侯)라 불렸습니다. 그런데 진나라(晉)의 세력가인 6경(卿)이 서로 다투면서 한(韓), 위(魏), 조(趙)는 흥하고 범(範), 중행(中行), 지백(知伯)은 쇠퇴하였습니다. 그러자 양후는 핍박을 받아 초(楚)나라 무산(巫山)으로 도망쳐 정착했습니다. 초한(楚漢) 전쟁이 일어났을 때 양씨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 강주(江州)에 살았고, 양계(揚季)는 벼슬이 여강태수(廬江太守)까지 이르렀습니다. 한나라(漢) 원정(元鼎, 무제의 연호로 B.C. 116~ B.C. 111에 사용) 연간에 양씨는 원수를 피해 다시 강을 거슬러 올라가 민산(㟭山) 남쪽의 비(郫) 땅에 거주하며, 밭 한 단과 집 한 채를 소유하고 대대로 누에를 치고 경작하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양계에서 양웅까지 5대에 걸쳐 아들 한 명만으로 대가 이어졌기 때문에 촉 땅에는 양웅 외의 다른 양씨는 없었습니다. 양웅은 어릴 때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장구(章句)에 몰두하기보다는 글의 대의를 파악하려 했습니다. 그는 두루 살피지 않는 것이 없었고, 사람됨이 온화하고 너그러웠으며 말을 빨리 하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생각에 잠기기를 좋아하며 조용히 미동도 하지 않기도 하였습니다. 욕심이 적고 부귀를 쫓지 않았으며, 빈천을 걱정하지 않고 품성을 수련하며 세상에 이름을 알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큰 도량을 지녔고 성현의 책이 아니면 좋아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부귀를 누릴 수 있어도 거절했습니다. 그는 사부(辭賦)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이전 촉 땅에는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살았는데, 그가 지은 부(賦)는 매우 장려하고 우아했습니다. 양웅은 마음속으로 사마상여를 존경했고, 매번 부를 지을 때마다 그를 모방하여 본보기로 삼았습니다. 또한 굴원(屈原)의 문장이 사마상여를 능가한다는 평가에 의심을 품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소(離騷)』를 짓고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져 죽은 굴원의 글을 보고 슬퍼하며, 읽을 때마다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군자는 때를 만나면 큰일을 실행하고, 때를 만나지 못하면 용과 뱀처럼 숨어 지내야 한다. 때를 만나고 만나지 못하는 것은 운명이다. 어찌 스스로 물에 뛰어들었을까!’ 그는 『이소』의 구절을 따서 반박하는 글을 지었고, 스스로 민산에서 흐르는 강물에 몸을 던져 굴원을 애도하며 『반이소(反離騷)』라 이름 지었습니다. 그는 『이소』에 의거하여 다시 한 편을 쓰고서 『광소(廣騷)』라 이름 짓고, 또 굴원이 지은 『석송(惜誦)』에서 『회사(懷沙)』까지의 글에 의거해 한 권을 쓰고 『반뇌수(畔牢愁)』라 이름 지었습니다. 『반뇌수』와 『광소』는 대부분의 글이 전해지지 않고 『반이소(反離騷)』만 전해지는데, 그 글에서 양웅은 자신의 가계의 연원을 이야기했습니다. 주나라(周)의 일가여, 분수(汾水)의 귀퉁이에서 조상이 시작[鼻祖]되었네. 덕 있는 조상 희백교(姬伯僑)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양후(揚侯)까지 흘러왔구나. 주(周)와 초(楚)의 대업이 깨끗해지니 황족의 계통에서 분리되어 나왔네. 강물 따라 애도문을 보내니 삼가 상강에서 억울하게 죽은 굴원을 애도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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